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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학의 정신 - 세속과 초월의 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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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학의 정신 - 세속과 초월의 합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최고 목표는 잡다하고 변화무상한 현실, 즉 형상을 초월하는 불변의 원리, 궁극의 존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서양 철학에서는 보편과 특수, 초월과 내재, 신과 세계 문제로 나타난다. 또 불교에서는 삼론종의 경우 진제와 속제, 화엄종의 경우 이(理)와 사(事)의 문제로 나타나고, 신유교에서는 이(理)와 기(氣)로 대립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문제 해결에 있어 서양 철학은 둘 중의 하나의 선택에 골몰해 왔다. 현대의 유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단언한 바 있듯이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구조를 바탕으로 단순히 모양 바꿈식의 표현만 반복해 왔다. 바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통한 이데아론의 전개는 이상에 해당하는 <이데아>와 현실에 해당하는 현상 간의 이원론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플라톤은 모든 육체적, 감각적인 것을 벗어나서 참된 이성만으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의 최대의 완벽한 산물이 기하학이라고 보았으며, 이 기하학만을 진실을 탐구하는 유일한 학문으로 간주했다. 바로 이성적으로 파악된 세계는 기하학적 형상의 완벽한 세계이다. 그것은 곧 참된 이데아의 세계요,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이 초월적 이데아 관념은 중세에서 천국과 인격신의 관념을 낳았으며, 근세에는 자연의 입법자라는 관념을 낳았다.

인간과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는 신(神)은 철학에서는 항상 미해결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며 종교에서는 절대화되어 인간은 신에 대해 무력한 존재로서 신의 은총의 대상이 되고, 신은 인간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과학에서 신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한 입법자로 임명되어 무한히 존경받는 존재가 된다.

동양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 있어 이 세계와 유리된 기하학적 이성, 혹은 초월적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관념은 이 세계 자체가 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色卽空, 空卽色, 一中多, 多中一, 非有非無 등의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동양에서는 Neither/ Nor의 논리로 발전하여 이상과 현실, 즉 세속과 초월이 같다거나 혹은 그 양쪽을 다 부정한 가운데 길을 택할 둘 알았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히 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인격적 차원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국철학을 포함한 동양의 학문이란 이성 능력이라기 보다 인격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으며, 知德一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중국철학의 정신은 각 유파 간에 다소의 사유 방식과 실천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상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으로서 최고 성취인 성인(聖人)이 되는 것, 이른바 天地境界에 도달하는 것이다.

흔히 유가(儒家)는 표면상 인륜도덕을 말하고 정치를 논하는 세간의 철학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은 內聖外王적이다. 즉 안으로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四端이나 맹자의 浩然之氣는 인간과 사회적 차원인 도덕경계를 넘어서서 인간과 우주적 관계인 천지경계까지 도달하고 있다.
공자가 자기 일생동안 도달해온 경계의 변화를 서술한 것을 보면, <사십이불혹>의 도덕경계를 지나 천명을 알고 천명에 순종하는 천지경계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맹자는 명도, 集意, 勿忘, 물조를 통해 호연지기를 길러 천지경계에 도달해야 함을 설파했다. 호연지기를 지닌 사람은 단순히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길을 걷는 大丈夫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대장부의 굳세고 큼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호연지기를 지닌 사람의 굳세고 큼은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에서 말한 것이다.

주자는 “호연지기는 천명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안된다. 호연이라 말하면 이미 넓고 크고 굳세다는 뜻이 있다. 장강, 대하가 호호하게 흐르는 것과 같다. 부귀, 빈천, 위무로도 타락시키거나 뜻을 빼앗거나 굴복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은 모두 호연지기 상태를 형용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한 바는 바로 天下와 天地 사이의 경계 차이를 말한 것이다.
道家에서 말하는 眞人도 유가의 성인과 같은 의미이다. 흔히 도가는 無, 無爲, 無知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세속을 등한시하는 것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도가에서 말하는 무지는 자연상태, 혼돈상태의 무지가 아니다. 도가의 무지는 지식을 초극한 경지요, 後得의 무지를 지닌 사람은 지식상으로 만물과 혼연일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었음을 자각하고 있다. 원시적 무지 상태를 넘어선 자각이 있기에 그 경계는 천지경계인 것이다.

한편 노자가 <바른 말은 거슬리는 것과 같다>거나 <賢德은 심원하여 세속과는 반대이다. 그런 후에야 大巡에 이른다>, <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만약 그가 비웃지 않으면 그것은 족히 도가 될 수 없다>라고 하여 세속에 반대되는 것으로 비춰지기 쉽다. 또 <기인는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고 하늘과는 친구이다. 하늘의 소인은 군자이고 사람의 군자는 하늘의 소인이다>라고 하여 도가의 도인은, 세상을 버리고 홀로 독립하여 산다>는 기개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도가의 경향은 상식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한 것이지 세속을 반대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참으로 도가는 兩行을 주장한다. <그 하나라 함은 하늘과 함께 함이요, 하나가 아니라 함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이것이 도가의 天과 人의 兩行이다. <홀로 천지정신과 왕래하며, 시비의 분별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속과 더불어 산다.> 이것이 도가의 방외, 방내의 양행이다.

묵자의 겸애설은 백성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겸애라는 측면에서 인간 본질을 구현하는 유가의 인(仁)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그는 도덕경계까지는 미쳤어도 천지경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한편 名家는 형상세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형상을 초월한 보편자를 습득하려고 했다. 혜시는 천지일체론을 좇아서 <널리 만물을 사랑하라.> 하였고, 공손룡은 <이 변론을 다하여 명과 실의 관계를 바로 잡아 천하를 교화하려 한다> 고 말했다. 그들은 스스로 내성외왕의 도를 강구했다고 자부했으나 형상 초월의 지식을 실생활에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이는 마치 객관적 세계를 관념으로만 추구하려 했던 플라톤 류의 서양 철학적 한계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중국 철학은 장구한 세월을 통해 世俗과 超越의 세계를 조화시키려고 애써왔으며, 그 최고 경계를 세속에 살면서 동시에 세속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어로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논리 아닌 논리,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중국 철학의 특징은 철학 그 자체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넘어선 세계, 세속과 초월이 하나된 세계를 체득할 수 있는 修道와 道德의 길, 聖人과 眞人의 길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만약 세속과 초월이 하나가 되지 않고 둘 중의 하나만 택하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귀속될 뿐이라면 인간은 영원히 고통과 질곡, 모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속에서의 초월, 이상의 세계화만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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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tao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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